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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2일 토요일

GM 대우의 수난

 
처음 창설 당시의 회사명을 바꾸지 않고 계속 유지하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주인이 바뀌면서 또는 회사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이름을 바꾸는 회사를 종종 주위에서 본다. GM Korea 창설 당시에 그회사에서 근무했던 나로써는 GM Daewoo가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만감이 교차한다.

GM Daewoo라는 이름에서 Daewoo를 떼어내고 GM Korea로 바꾼다고 한다. GM 대우자동차는 그동안 숫한 곡절이 많았다. 1972년에 당시 도요타의 코로나(Corona)를 조립 생산하던 신진자동차는 미국 General Motors 와 합작회사를 설립 GM이 한국에 진출하는데 교두보가 되었다. 회사 이름은 GM Korea. 이 회사는 오스트랠리아의 GM Holden, 필리핀의 GM Philippine과 독일 Opel 에서 수입한 CKD로 시보레 1700 소형 승용차와 Rekord 중소형 승용차를 조립 생산했고, 상용차로는 일본의 Isuzu로 부터 엔진 트랜스밋션을 수입하여 국내에서 중형 트럭과 버스를 생산하였다. 
 
이렇게 1972년 GM Korea는 시보레 1700 (Chevrolet - 쉐브롤레이 가 원음에 가까운 발음) 이라는 엔진 배기량 1700cc의 소형 승용차를 생산 판매하기 시작한다. 당시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 규모는 연간 만대가 되지 않는 아주 작은 규모였으며 소형차로 배기량 1700cc는 한국의 자동차 시장을 잘 모르고 한 선택이었다. 엔진이 소형급으로는 컸을 뿐만 아니라 당시 택시 수요도 일년에 몇 천대 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시장이었다. 게다가 계속되는 심각한 품질 문제에 불만인 고객들의 막가파식으로 항의하는 고객때문에 GM Korea 본사 정문앞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한번은 현관 앞에 고장난 시보레1700택시를 트럭으로 싣고와서 세워놓고 불을 지른 일도 있었다.
 
시보레1700 이 출시된 다음 해 1973년에 중동에서 불어온 제 1차 오일쇼크로 온세계 경제는 대 혼란에 빠지게 되고 기름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바람에 시보레1700 은 경쟁사 기아자동차 브리사 1000cc에 눌려 맥을 못추고 GM Korea는 생산을 중단해야 될 정도로 심각한 재고 누적에 고심하게 된다. 이미 수입된 CKD 재고 소진을 위해 시보레1700을 디자인을 바꾸고 차명도 바꾸면서 안간 힘을 쓰지만 판매가 개선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대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외국자본이 들어온 합작회사 GM Korea는 미국 GM 본사에서 파견된 임원들이 경영을 맡으면서 한.미 문화의 차이로 직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혼란기에 접어든다. 판매는 부진하고 급기야 낙하산 투하식으로 임명된 퇴역장성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회사 직원들은 모럴 해저드에 빠지게 되며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그리고 나는 이런 회사는 비젼이 없다고 보고 1977년 3월에 GM Korea를 떠나고 현대자동차 해외영업부로 자리를 옮긴다.
 
 
이런 혼란속에 2-3년이 흐르자 GM Korea는 과거 신진자동차 시절의 한국 제일의 자동차회사의 위치를 현대자동차에 빼았기는 수모를 당한다. 현대는 순수 국산차 포니를 개발하고 있었고 1976년에 국내시장에 판매를 시작하게 된다. 순수 국산차 ... 당시 한국에서 생산 판매되는 모든 자동차는 외국에서 부품을 수입해서 국내에서 조립 생산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자면 국산차라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GM Korea는 판매가 부진하자 외국 회사라는데 국민의 반감 때문이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결단을 내고 회사 이름을 우리말로 바꾸기에 이른다. 새로 지은 회사 이름은 새한자동차. 아마 새한자동차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않을 것이다. 새한자동차는 대우그룹이 GM의 파트너가 되면서 회사 이름은 GM 대우자동차로 바뀌었기 때문에 오래 사용되지 않았던 이름이다.
 
새한자동차의 미국측 파트너 GM은 판매 부진으로 여려워진 상황에서 GM측의 새로운 파트너로 대우그룹을 받아들인다. 새로운 합작 파트너가 된 대우그룹은 GM 대우가 생산한 자동차를 수출하고 싶은 김 우중 회장의 뜻과는 달리 GM은 해외 수출을 금지하고 국내에서만 판매하도록 하는데 불만이었다. 그는 파트너 GM의 지분을 몽땅 인수하겠다는 마음으로 GM 측과 고의적인 (적어도 외부에서 보기엔) 갈등으로 불편한 관계를 10년 넘게 이어 간다. 급기야 GM은 나머지 지분을 대우에 넘기고 한국에서 철수해 버린다.
 
김 우중 회장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었고 회사 이름도 대우자동차로 바꾼다. 이제 마음 껏 해외 시장을 개척할 수 있게 되면서 수출의 선두주자인 현대차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충돌하게 된다.

그는 처음 자동차회사를 인수하고 자동차 회사 경영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기자들에게 한 말이있다. 그는 원래 섬유제품으로 시작해서 대기업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와이셔츠 쎄일즈맨이라는 닉네임이 늘 붙어 다닐 정도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자동차 생산도 와이셔츠 만드는 거나 다를 게 없다. 마구 찍어내면 되는 게 아니냐는 말로 자동차 업계 적어도 현대자동차에서 오래 동안 산전 수전을 경험한 사람들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대우는 그러나 자동차 회사로써 크게 성공하지 못한다. 신제품 개발이 여의치않게 되자 일본 닛산 자동차에서 수입한 KD(Knock Down)부품으로 국내에서 아카디아라는 이름의 중형차를 조립 생산하고, 제 2 차 기름값 파동에는 일본 스즈키에서 경차를 카피해서 경차 티코를 국내에서 생산하는 등 자동차 국산화를 지향하는 현대자동차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계속한다. 이렇게 하면서 제품의 경쟁력은 신차를 계속 개발해온 현대차에 큰 차이로 떨어져 열세로 밀리면서 회사의 경영난은 시작된다. 대우자동차는 재정난에 휘말리게 되고 채권단 손으로 넘어가면서 대우의 김 회장은 무역거래법 등 위반 혐의로 회장직에서 물러나 해외로 도피, 유랑생활을 해야하는 불운을 맞는다.

그러면서 대우는 다시 GM의 손으로 돌아갔지만, 회사 이름은 혹시라도 우리 국민의 거부감을 두려워서 였는지 GM 대우자동차를 계속 유지한다.  

GM이 단독으로 소유하고 경영해왔으나 사정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한국을 GM의 아시아지역 소형차 생산기지로 전략적으로 이용하려는 것 같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GM 대우 수출 차에 적용하던 시보레 (쉐브롤레이) 엠블렘을 GM은 GM 대우에서 생산하는 국내외용 모든 차종에 아예 엠블렘을 바꿔 시보레 보우타이를 달아주고 회사 이름도 GM Korea로 바꾸기로 했다. 이제 우리나라 시장 규모가 GM한테 중요한 시장으로 부각됐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개발 생산기술이 경쟁력이 있다고 보고 심기일전 싸워보겠다는 전략인 것 같다.

1966년에 창설된 신진자동차가 합작회사로 변신하면서 1972년에 GM Korea를 설립하여, 1976년에 새한자동차로 이름을 바꾼다. 1978년에 한국측 파트너가 바뀌면서 GM 대우자동차는 10년 넘게 한.미 주주 파트너간 갈등 끝에 GM은 포기하고 물러난다. GM 지분을 인수한 대우그룹은 회사 이름을 대우자동차로 바꾸지만, 상품의 경쟁력이 없는 대우자동차는 판매부진으로 재정난에 대우그룹 지분은 채권단으로 넘어간다. GM이 채권단으로 부터 지분을 인수해 그동안 GM 대우자동차로 기사 회생시켰다. 이제 General Motors의 단독 소유로 돌아가면서 다시 GM 대우의 '대우'를 떼어내고 GM Korea로 회귀하는데 34년의 결론인 것이다.



2010년 9월 28일 화요일

Nissan Leaf EV

 

닛산은 순수전기 자동차 Leaf에 관한한  지금 배부른 장사를 하고있다. 

 

닛산의 홈페이지 My Nissan Leaf 에 따르면 닛산은 9월 23일부터  LEAF 예약 접수를  중단한다고 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닛산이 외부에 송부할 이메일에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닛산은 Leaf의 주문이 20,000대 목표를 금년 12월까지는 달성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목표했던 것 보다 3개월 일찍 20,000대 목표를 달성했다. 그래서 2010년 9월 23일부로 닛산은 최고의 고객 서비스와 최상의 닛산 Leaf 의 경험을 고객에세 제공하는데 초점을 맞추기 위해 예약 주문 시스템을 일단 중단한다는 것이다.

 

현재 예약이 되어있는 고객은 앞으로도 계속 구매를 하거나 리즈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Leaf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 예약을 하지 않은 분들은 http://www.nissanusa.com에 정보와 업데이트를 위해 서명하면 된다. 이런 고객에 대한 그 다음 단계는 내년에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Source: My Nissan Leaf]

2010년 9월 22일 수요일

화란에서 온 편지 An E-mail from Nederland

나와 1980년대 초부터 알고 지내온 화란 사람이 있다. 그는 현대자동차가 처음 1977년에 해외법인(Hyundai Motor Holand)을 설립하여 2 년 동안 운영하다 청산한 법인을 인수한 회사 (Greenib Car B.V.) 의 월급쟁이 CEO 였던 Mr. Bert Kreber다. 그는 현대자동차 네델란드 대리점 CEO로만 20년 넘게 일하며 한국에도 수 없이 출장 방문했던 적극적인 비지니스맨이다.

I know a Dutchman who was CEO of Hyundai's distributor in the Netherlans, Greenib Car B.V, for over 20 years. He and I have known each other since early 1980's and became close friend for that long time.

 

그는 내가 1997년에서 1999년 초까지 미국현지 법인장으로 있을 때도  캘리포니아로 나를 방문할 정도로 가까운 친구가 되어있었다. 그는 나와 동갑으로 현직에서 물러나 은퇴생활을 꽤나 적극적 으로 엔죠이 하고있다. 그는 내가 기아자동차에서 퇴임했을 때 나를 화란으로 초청해 나는 그 친구 덕분에 며칠을 지낸 일이 있다.

He made a visit to me at HMA in Fountain Valley, California in 1998 when I was CEO of the whole north American operations of Hyundai Motor Company. After I retired from Kia, I visited the Netherlands on his invitation in 2003 and I spent several days with him. Like this even after he and I retired from each position we have kept in touch for years with warm friendship.

 

그런 그가 엇그제 이메일을 보내왔다. 한 동안 소속이 끊겨 궁금하던 차에 그의 메일을 보니 많이 반가웠다. 사진 까지 동봉해 왔는데 그의 최근 생활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다름이 아닌 자전거 탄다는 것이다. 작년에는 자전거로 헝거리를 일주했고, 지난 주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발해서 프랑스 칸느 근처에 있는 자기 집까지 1,000 미터가 되는 산길을 건너면서 700km를 6일에 걸쳐 자전거로 달려 갔다고 한다. 지난 6월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뚜르 드 프랑스 자전거 경기 코스 중 하나인 몽 벵뚜를 자전거로 올라 갔었다고 한다. 이런 모든 이야기가 내년부터 자전거를 시작해볼까 하는 나에게 큰 자극을 주고있다. 지금 당장 사버려?

He emailed me with photos of himself and his family. As I have considered cycling since some time ago and his email with pictures showing his sports activities with biking impressed me a lot and encourages me.

From: b.kreber@online.nl
To: mjuhn@hotmail.com
Subject: greetings from Holland

Hi Mark,

It has been some time that we had contact. I apologize for taking so long to give you a reaction.

I kept this email to answer you, but time flies and I have been rather busy, but undoubtedly has a remark to answer you.
I see you still very active on the mountain climbing. and have seen the nice photo’s.

Actually I do not know so much about all those social media, but this morning took time to study more on the facebook how it worked.

Last year I have been very busy training on the racing bike. Like I told you last year I made a trip on the bike around in Hungary,
just last week we started from Geneva ( where a friend of mine has a house) and with him we went on the bike to my house in Biot ( near Cannes) where I am now. 700 kilometres in 6 days, in the hills up to 1000 meters up and down, but it was a marvellous trip.

In June I did climbing by bike the Mont Ventoux (famous mountain of the Tour the France); see the photographs in the attachments. It has gradients of up to 12-15%, 26 kilometres climbing in one stretch. But it is fun.

 

Milco de Vries is also on the racing bike, and Ton van Soest will be in a short while (he is still doing marathon running, but will switch in October).

-- one paragraph deleted due to his personal business story---

Milco is doing fine, and is involved in electric cars in Holland. Wim Harmsen was in China with Jiangling but is now back in his house in Portugal,
and more or less retired. Through the social media I am greeting in touch with more and more Korean HMC friends

In June we had a big party with our daughter who turned 40 !!!!. I attached some photos. You see also my son and daughter there with the microphone

Dear Mark, please inform me what you are doing at the moment, I would be interested. Have a good time and good health

Regards
Bert Kreber

The Netherlands

2010년 9월 6일 월요일

Steve Bowen from S'pore

스티브 보우엔(Steve Bowen)은 내가 기아자동차 해외영업본부에 있을 때 해외 홍보담당로 채용하여 같이 2년여년 동안 나와 같이 일했던 사람이다. 2002년 한해 동안 그는 나와 같이 기아의 브랜드 이미지 개선과 제고를 위해 같이 일했던 잊지 못할 직원 중 한 사람이다. 오늘 그가 개인 일로 서울에 온 김에 나를 만나고 싶다면 저녁식사를 초대해서 그를 만났다.

I hired Steve Bowen as PR team leader of international business division of Kia Motors  and he worked for me for almost two years until I retired from Kia COO in early 2003.

The year 2002 was a special time for Kia when we made such distinguished achievement in enhancing awarness of Kia brand and upgraded the brand image in the global markets.

 

He came to Seoul on his personal matter and he invited me for dinner at Hilton hotel out of his busy schedule.

 

그는 한국에서 10년 가까운 기간 살면서 한국의 회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되는 회사를 보기 힘들었다며 홍보를 이해하는 보스를 만나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나와 일했던 때가 제일 익싸이트 했다면서 언제나 신이 나서 일했던 시절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그가 기아에서 근무하면서 그의 책임감과 기업 이미지 홍보를 위한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언하며 자발적으로 일을 찾아서 하는 그를 높이 평가하고 아꼈었다.

Before he joined Kia he used to work for some Korean companies in Seoul where, Steve said, he had experienced lack of communication skill in Korean employers not only because of language barrier but also a wrong perception about public relation. He mentioned that he often think the good old days when he as PR manager worked for me at Kia and it was most exciting. During his tenure as PR manager he always worked proactively with some fresh idea that could well work for Kia. At that time Kia was  struggling in the market mainly due to its bankruptcy in prior year before it was acquired by Hyundai and I would say he was a good part of my dream team of Kia when the company was in a turning point.

2010년 8월 30일 월요일

Bob Pickard & Margaret Key

 

오늘 낮에 만나 커피 한잔 같이 하고 싶다는 쪽지가  Facebook (http://www.facebook.com/markjuhn)에 날아왔다. 홍보(PR)계의 거물이 된 Bob Pickard가 보낸 쪽지였다. 그는 2002년 부터 2007년까지 에델만 코리아 사장으로 근무하다 일본 동경에서 에델만 일본(Edelman japan)과 한국(Edelman Korea) 총괄 사장으로 승진 동경으로 근무지를 옮겼었다.  

 

2년전 에델만을 떠났고, 금년 초에 Burson-Marsteller 아세아 태평양 담당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싱가폴에 있는 HQ와 호주, 인도, 일본, 한국, 중국, 홍콩 등 아세아 태평양 지역을 관장하고 있다. 이번 한국에 짧은 출장길에 잠시 짬을 내서 내 얼굴을 보고 싶었던 Bob이다. 그가 한국을 떠난 후에도 한국에 오면 꼭 나한테 연락해서 만나는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오른쪽 미모의 여성은 최근 버슨-마스텔러 코리아 (Burson-Marsteller Korea Co., Ltd) 사장으로 스카웃되어 한국으로 돌아온 Margaret Key (마가렛 키).  마가렛은 Bob의 후임으로 에델만 재팬에 근무했었다. 그전에는 현대자동차 홍보실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마가렛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이 4-5년은 된 것 같다.

I was so glad to see you guys again. Let's save some time to enjoy some drinks, either tequila or scotch, when we meet again this upcoming year end. 반갑다, 친구야!

 

 

 

 

 

2010년 8월 26일 목요일

고민

오래전 얘기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4 년간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본사로 귀임한 후였다. 20 년 넘게 모셨던 사장으로 정년 퇴임하신 분의 댁으로 문안인사를 간 일이 있다.  정년 퇴직 후의 삶을 즐길 것 같았던 그분의 얼굴에는 쓸쓸한 외로움이 깊게 젖어 있었다. 시간이 많아서 취미로 서양화를 그린다고 하셨다.

 

시간이 나시는 대로 회고록을 쓰는게 어떻겠느냐고 여쭈어 봤다. 그분은 웃으면서 할 이야기는 많지만 회고록을 쓰자면 현직에 있었을 때 같이 일했던 사람의 이야기가 나올텐데 그것이 여간 조심스러운게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잘 못하면 나만 옳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 처럼 남을 폄하하는 것 같이 읽힐 것이고 그것을 읽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일세대이다.  

1979년 네덜란드 라이모터 쇼에 전시된 포니 세단

 

자동차 산업의 산 증인이다. 1967 년에 설립된 현대자동차가 영국 포드 자동차에서 수입한 KD 부품으로 국내 울산공장에서 코티나를 조립생산하던 이야기와 우리나라 첫 국산차 포니를 개발 기획단계에서 부터 국산 자동차 포니의 수출을 위한 해외시장개척 시기를 거쳤기 때문이다. 

 

숨은 이야기를 많이 아시고 계실 것 같아 자동차산업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정리하는 것은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건의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끝내 회고록 집필을 하지 않고 아직 서양화를 그리면서 개인전도 열며 조용히 지내고 계신다.

 

 

필자도 25 년이 넘는 굴곡이 많았던 자동차 수출과 관련되는 수 많은 일들을 정리하여 회고록 비슷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직장생활 말년이 가까워지면서 여러가지 줄거리로 각색도 해봤다. 그래서 1977 년 3 월에 경력사원으로 해외영업부에 입사하여 해외시장개척 등 수출 초기의 좌충우돌했던 일들을 생각나는대로 엮어 보았다.

 

하지만 자기 자랑만 하는 것 같이 들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그냥 에피소드 수준으로 회사의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없는 소소한 일의 이야기를 골랐다. 초기 해외출장다니며 외국 문화와 습관을 몰라서  실수하는 얘기나 대리점으로 부터 품질문제로 망신당했던 일 등등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적어 봤다. 하지만 적어도 회고록인데 우스게 소리로 수출 초창기에 이 나라 저 나라 출장 다니면서 해외마케팅의 마자도 모르는 촌놈 행세나 했던 일만을 적는 것도 문제다 싶어 주요 업적을 나름 추려봤다. 나는 어떤 직책을 맡더라도 선임자가 맡았던 업무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싫었다. 같은 업무도 진화시키려고 노력을 해왔던 터였다. 

 

이런 철학에서 일을 하다 보니 오늘의 현대/기아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한 자랑할만한 업적도 이룩했다. 그러나  큰 일을 시작하는데는 항상 장애가 많다. 우선 단독을 결정해서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상부의 결재를 받아 시행하여야 한다. 이 과정이 어려운 것이다. 큰 일일수록 과정이 복잡하고 더 어렵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해보지 않았던 일을 벌이는 모험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런 과정을 회고록에 예를 들어 미국의 10년 10만 마일 워런티의 결정되는 과정을 쓰다 보면 나와 갈등을 일으켰던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고록을 집필을 시작해놓고 마지막 부분을 끝맺음하지 못하고 컴퓨터 서류함에서 수년째 잠 재우고 있다.

 

요즘 15 년전에 예전 그분한테서 들었던 얘기가 더욱 쟁쟁하게 귓가에 울린다. 지금 많이 고민하고있다.

2010년 7월 6일 화요일

이제 현대로 돌아오고 싶어한다

1990년대 말 현대자동차는 정말로 힘든 때를 보내고 있었다. 1986년 회사 설립후 초기 2-3년간은  년간 판매가 엑셀(Excel) 단일 차종으로 신기록을 세우는 20만대가 넘었지만 1989년부터 10년동안 판매량은 반토막이 나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일 좀 한다는 현지 중견 간부 직원이 사표를 냈다는 보고를 듣는 일이 다반사였다.  힘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떠났던 직원을 이번에는 현대에서 다시 불러들였다. 현대 미국 판매법인(HMA)은 마이크 오브라이언(Michael O'Brien)을 상품및 기획 담당 부사장으로 영입했다는 소식이다. 이 자리는 죤 크라프칙(John Krafcik)이 2008년에 CEO로 승진되면서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현대를 떠난 오브라이언(55)은 도요타의 미국 판매 법인에서 14년간 근무했으며 기획담당 부장으로 있었고 최근에는 도요타의 밴, 픽컵트럭, SUV 차종과 파워트레인을 포함하는 제품계획과 선진 고급 기술과 법규 대응 기획을 담당했었다.

 

내가 북미총괄 사장으로(HMA 포함) 현지에서 근무할 때 브리이언은 소심하면서도 신중한 간부사원으로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나는 그를 신뢰했었다. 그는 부품, 제품기획, 마케팅 담당 과장이었다. 모터 스포츠 프로그램도 맡았었다. 이번 돌아오는 그의 직책은 현대의 모델 라인업 확장과 사업기획을 관장하며 크라프치크 사장한테 보고하게 된다고 한다.

 

일본 경쟁사인 도요타, 혼다, 닛산 따라잡기에 올인하는 현대는 작년 자동차 판매가 급감했던 미국에서 판매가 증가한 단 세 메이커 중 하나이다. 향후 12개월에 현대는 신형 엘란트라(국내명 아반테), 액센트(베르나), 엘란트라의 파생 차종 스포티 쿠페와 고급 세단 에쿠스, 하이브리드와 터보 챠저가 적용되는 소나타를 소개할 계획이다. 일년에 무려 다섯 차종이나 된다. 현대는 또 소나타 웨건에 대해서도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판매가 증가하고 다양한 신제품 계획이 있을 때 사기(morale)가 제일 많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 직원들이고 판매 대리점인 딜러들이 제일 좋아한다. 신제품 계획이 다양하다는 것은 회사가 미래를 준비하고 뚜렷한 비젼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의 미래를 밝게 보고 회사를 떠났던 직원이 되돌아 오고 싶어하고 인력 시장에서 헤드헌터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2010년 5월 11일 화요일

Innovation Award

현대자동차가 세계 5 대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한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70 년대 초 국내 자동차산업 최초로 우리 고유의 모델 포니를 개발하면서 역사는 시작된다. 바로 고 정  세영 회장님이 그 장본인이다. 1976년의 포니가 없었으면 지금의 소나타도 그랜져도 에쿠스도 그리고 지금과 같은 해외시장에서의 현대는 없었을 것이다. 

 

1976년 부터 해외 시장에 수출을 시작하면서 수 많은 역경을 거치며 일군 대하드라마를 쓰신 분이 고 정 세영 회장님이다. 그분의 세계를 향한 도전 정신과 유업을 기리기 위해 만든 포니 정 재단은 2007년에 설립되었으며 매년 혁신상을 시상한다.

 

포니 정 혁신상은 산업 근대화와 자동차 공업 세계화의 개척자이자 선구자였던 정세영 회장의 혁신적 사고와 도전 정신을 기리고 이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제정되었다. 외교,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전분야에 걸쳐 원칙을 지키는 정도정신, 불굴의 도전정신, 혁신적 창조정신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주도함으로써 국가와 사회발전에 탁월한 업적을 이룬 개인 혹은 단체를 대상으로 수상자를 선정한다.

 

금년이 제 4회 포니정 혁신상은 배우 차인표와 신애라 부부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들에 대한 주최측의 소개문을 인용하여 아래에 옮겨 놓는다. 대단한 선행을 하고 있다.

 

1995년 부부의 연을 맺은 연기자 차인표, 신애라 부부는 결혼 이후 왕성한 연기 활동과 더불어 사회에 나눔을 실천하는 봉사와 기부, 후원활동을 지속적으로 함께 해 오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은 아프리카(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 중남미 (아이티, 보리비아), 동남아(필리핀) 등 세계 각지의 불우한 어린이 24명, 대학생 8명 (현재 2명은 졸업)과 1 대 1 결연 후원을 맺어 이들의 삶과 꿈을 돌보고 있습니다. 특히 직접 두 자녀를 공개 입양해 사랑으로 돌봄으로써 입양에 대한 우리나라의 오랜 편견을 없애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현재도 이들의 봉사와 기부 활동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러한 나눔의 정신은 우리 사외를 더욱 건강하고 풍요롭게 변화시키는 데 큰 역활을 할 것입니다

 

△ 어나운서가 시상식 시작을 알리는 안내를 한다.

△ 생전의 고 정세영 회장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10 여분 동안 상영하여 정세영회장님을 잠시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 시상대에 오른 차인표 부부가 시장자 앞에

△ 시상후 단상에서 잠시 포즈를 잡는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포니정 재단 김진현 이사장, 차인표씨와 신애라씨 부부.

△ 시상식을 마치고 자리를 옮기기 위해 밖으로 나오자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건물 외벽에 비쳐 아름답게 보이는 건물 보다 더 현대산업개발이 아름다운 회사라고 느꼈다.

△ 시상식후에 파크하야트 호텔 2층 코너스톤 양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축하 만찬을 가졌다.

△ 오늘의 호스트 정몽규 산업개발 회장이 자리를 들러보며 우리 테이블에 .. 같이 기념사진.

맨왼쪽 부터, 김판곤 (주) 희준커뮤니케이션 회장, 마크 전,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이수일 동부제강 사장, 김종일 경신공업 사장. 이 분들과는 과거에 현대자동차에서 같이 근무했던 일이 있다.

 

 

 

2010년 4월 22일 목요일

Bob Pickard - PR Man

Mr. Bob Pickard, former president of Edelman North Asia and now president of Burson Marsteller of Asia Pacific visited Seoul on his business trip.

He and I have known each other since 2002 when he was managing director of Edelman Korea where he turned the struggling consulting firm around to be a strong and the best one in terms of clients satisfaction and revenue growth in Korea. He left a huge footprint in Edelman's history ever.

Bob saved some time to share with me today out of his busy schedule and that I appreciate. We had a lunch together at Lotte hotel and exchanged our insights over a global economy.

 

전 에델만 북아시아 사장이며, 현 버슨-마스텔러 아시아 태평양 사장인 밥 피카드씨가 서울에 왔다.

나는 그를 기아차 해외 홍보를 맡겼던 2002년 부터 알고 지낸다. 당시 에델만 코리아 사장. 그는 부임후 획기적으로 에델만한국지사를 회생시켜 한국에서 고객만족 최고의 PR회사로 만드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2010년 3월 30일 화요일

COOs' Club

젊은 시절 한솥 밥을 먹었던 그러나 지금은 정년 퇴임후 새로운 인생을 즐기며 사는 옛 동료들과 모이는 모임이 몇개 된다. 그 중에서도 같은 해외영업본부가 아니지만 항상 지근에서 일하며 지냈던 사람들과 매달 한번 정도는 만나 점심식사를 하며 우정을 나눈다.  이들은 내가 과장으로 현대차에 입사해서 퇴임할 때까지 같은 회사에 근무했던 분들이다.

 

모두 같은 시절에 현대/기아에서 부사장 본부장(COO)으로 퇴임한 분들이다. 이제 모습은 변해 가지만 마음은 아직 청춘이다.

 

←왼쪽부터; 김중성 (기아차 판매 담당부사장, 유재환 인천제철 부사장, 전현찬 현대차 판매 담당 부사장, 신도철 기아 소하리공장장 부사장, & 마크 전 기아차 해외영업 부사장.

 

나는 요즘 옛 직장 동료나  학교 동창회에서 그들을 만나면 꼭 단체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한다. 젊은 이 순간을 기억하라며 사진을 메일로 보내준다.

 

내년이나 그 후에 이 사진을 보면 그래도 그때가 젊었었네 하며 추억으로 남기라고... 

 

2009년 12월 15일 화요일

초창기 현대 대만대리점

현대자동차가 해외 시장에 처음으로 자동차를 수출하기 시작한 해가 1976년이다. 당시에는 누가 현대에서 만든 포니가 있다는 것을 알리도 없었을 때였다. 카다로그 하나 달랑들고 해외에 나가 발품팔이 하듯 우리 차를 수입할 만한 자동차 사업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서툴은 영어로 설명하면서 그렇게 우리의 애마 Pony 수출은 시작되었다.

When Hyundai Motor for the first time attempted to explore overseas markets to sell its own model Pony sedan in 1976 nobody knew what the hell Hyundai was and actually there were not many people who knew about Korea.

 

수출 초창기 현대의 주요시장은 중동 몇나라와 중서부 아프리카 몇나라 그리고 중남미가 다였다. 그중에 아시아에서는 대만이 유일한 시장이었다. 왜냐하면 기타 시장은 오른쪽 핸들(RHD) 시장이었고 현대는 아직 RHD Pony가  개발되지 않았던 때였으니까.

In an early stage of Hyundai's export the main target markets were the Middle East where the oil money was flowing into the region and the economy was booming after the first oil shock in 1973, the mid-west Africa as well as some countries of the Latin America. The only country in Asia was Taiwan due to other countries in the region were using RHD system that Hyndai was not prepared for.

 

엇그에 내가 가끔 지인들과 소식을 직 간접으로 주고 받는 facebook에 John Wang 이라는 사람이 친구되기 원한다며 나의 확인을 기다린다는 메시지가 이메일로 들어왔다. 대만에 있는 나의 30년 넘게 친하게 알고지내는 대만 재벌 Jack Wang의 아들 John Wang이다. 나한테는 항상 Uncle 이라고 부르는 청년 사업가이다.

Last week I received a message on my facebook saying that John Wang wants to be my firend. He is the oldest son of my old friend Mr. Jack Wang who once was the distributor in Taiwan representing Hyundai in the country for many years. My friend Jack and I have known each other since 1977 and it has been over 32 years now.

 

그 친구가 한국에 왔다, 사업차 한국에 온김에 나 '삼촌'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어제 모처럼 밤에 강남에 있는 한식당에서 식사를 같이했다.

The son John visited Seoul on his business trip and he invited me to a dinner last night.

He is now a businessman running a clean energy business named Ever Energy Co., Ltd which produces solarcell in Taiwan. His father Jack visited Korea last year with his son and a daughter and we, my ex-colleagues of Hyundai export veterans, met for a dinner together at the Hotel Park Hyatt.

 

From right; John Wang, CEO of Ever Energy Co., Ltd.,  J.J. Lee Ph.D Exc V.P and David T.W. Hsu marketing manager of the company.↓

 

Seated from left; Joerg Walbere, CEO of SolarWord, John Wang and me.

Rear from right Mr. Hyunwoo Park Chairman of SolarWorld engineering, Dr. Lee, and Hsu. ↓

SolarWorld의 CEO Joerg Walberer씨는 한국정부 공무원들의 관료주의 (bureaucracy)에 혀를 내눌렀다. 신란한 불평을 토로했다. 은행도 마찬가지 라는 것이다. 클린에너지 관련 회사로 SolarWorld는 세계 제일의 독일회사이다. 이 SolarWorld Korea에서 시설 증축을 위해 대출을 신청했지만 은행에서는 귀를 막고 말을 듣지도 않더라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철학에 대하여 비판했다. 나는 대통령의 뜻과 관계없는 일반 공무원의 관료주의가 문제라며 그를 이해시키려 했지만, 한국 관료에 대한 불만은 세계 제일의 친환경 에너지 개발회사를 나라 밖으로 내몰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Mr. Joerg Walberer's compaints againt the bureaucracy of Korean Goverment officials'  seemed to reach at the limit of his tolerance. It's a shame.

2009년 11월 14일 토요일

Once upon a time 61 <Mrs. Britingham>

내가 학교 다니면서 배운 영어는 중학교때는 영어 교과서에 밑줄쳐 가면서 단어를 외우는 게 전부였다. 그렇다고 단어를 엮여 문장을 만들 줄도 모르고 영어로 말할 줄 아는 것도 아니었다. 시험때 시험지에 빈칸 채우기 문제를 위한 공부가 다 였다. 고등학교 일학년때 영어 선생님은 언제나 무조건 한과를 통째로 암기해 오는 숙제를 내줬다. 모두 암기해야 했고 수업시간에 재수가 없어 걸리면 일어서서 암기한 것을 외워야 했다. 한 줄도 못 외웠을 경우는 회초리로 손바닥이 불이 나도록 맞았다.  내가 제일 싫어한 과목이 영어였고 영어선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은 일정 때 일본인 영어 선생한테서 배운 영어였던지 발음이 형편없이 나빴다. 예를 들어 "What is that?" 을 "왓도 이즈 닷도" 정도로 발음을 했다. 액센트도 없고 인토네이션도 없었다고 기억된다. 그래도 외워야 했다. 발음은 어쨌든 관심없다. 이런 선생님 밑에서 영어를 배웠으니 원어민 선생님이 말하는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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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9일 월요일

Once upon a time 60 (Mrs. Britingham>

이들은 장항제련소 직원들이 사는 사택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이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에 집에 남아있는 부인은 아까운 시간을 사람들을 집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데 쓰고 있었다. 거기에 내가 영광스럽게 낀 것이다. 영어 학습에 참여했던 어른들은 조그만 시골인 장항의 읍장, 경찰서장, 세무서장, 의원 원장, 교회 목사님 등 장항읍에서는 유명 인사들이었고 이들 사이에 두 고등학생이 끼게 된 것이다.

 

처음 우리가 그분의 그룹 개인교습에 참석하기 시작한 때는 겨울이었다. 수업 시작하는 첫날 나는 친구와 함께 그 집 현관 밖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현관문을 열어줄때 까지 기다리는 짧은 순간 두려움과 설레임이 섞인 그런 느낌이었다. 가슴이 쾅쾅 울릴 정도로 뛰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이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가 열고 들어오라며 친절히 안내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따듯한 온기에 알 수 없는 근사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 퍼져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맛이 있는 냄새였다. 응접실에는 한쪽벽에는 서가에 많은 책이 꽂혀있고 책상이 그리고 'L'자로 벽 가까이에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응접실 가운데에는 난로가 방안을 따듯하게 해주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따듯하고 포근한 방안 분위기였다.

 

영어 교실로

to be continued

2009년 11월 6일 금요일

Once upon a time 59 <Mrs. Britingham>

당시 장항은 조그만 재래시장으로 5일장이 열렸다. 그들이 먹을 음식자재가 있을 리 없으니 매주 한번씩 군산 공군기지로 가서 물품을 구입했다. 군산으로 강을 건너 갈때는 지프를 배에 싣고 내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였다. 미군 공군 PX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일이 끝나면 배를 타고 장항으로 다시 돌아온다. 크지 않은 배는 승객 위주의 구조였기 때문에 배 앞부분에 작은 갑판에 지프를 싣는 것은 지금 생각에도 아슬아슬 했다.

 

금강하구는 간만의 차이가 9 미터가 넘게 컸기 때문에 군산과 장항 부두에는 대형 선박 정박용 부잔교(浮棧橋)가 있었다. 이런 부잔교에는 언제나 외국 대형 화불선박들이 정박하고 있어 일반 여객용 도선에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밀물과 썰물에 수위가 변하므로 경사지게 만든 접안시설은 승객들이 오르 내릴때 경사진 선착장으로 뛰어 오르고 내렸다. 이런 선착장과 배의 갑판사이 틈새를 널판지로 건널 목을 깔아 그 좁은 널판지 위로 자동차 바퀴가 굴러가도록 하여 배를 오르고 내렸다.

하루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길에 선착장에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배의 갑판위에 그들의 지프가 있는 것을 보았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기회다 싶어 배에 타자마자 이들 앞으로 가서 말을 걸었다. 처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헬로' 아니면 '굿 아프터 눈'이었을 것이다. 제련소 기술고문인 남편은 헐리우드 영화배우 '리 마빈 ' 같이 흰 머리에 무뚝뚝한 인상이었다. 부인되는 분은 미인이었다. 이들은 차를 타고 어디 갈때는 털이 길고 색갈이 누렇고 흰 예쁜 얼룩 강아지를 꼭 가슴에 안고 데리고 다녔다.

 

그들에게 다가간 나와 단짝 친구는 이름을 말하고 만나서 반갑다는 둥 말도 안되는 영어를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몇마디 하지도 못했는데 배는 벌써 장항 선착장에 도착해서 나중에 기회 있으면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며 차를 몰고 떠나는 차에 나 혼자서 손을 흔들었다.  

 

이들과 처음 몇마디 한 것이 어찌나 신기했던지 가슴이 방망이 질 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들이 알아 들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아마 대충 짐작해서 우리가 한 말을 해석하지 않았을까 한다.

 

두어 주일 후엔가 군산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 노부부와 같은 배를 탔다. 그들은 한 주일 분 생필품을 차에 가득 싣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와 내 친구는 용기를 내서 차에 다가가 인사를 했다. 나는 숫기가 좀 없는 편이었다. 나는 중학교 3년동안 그리고 고 2학년이 될 때까지 5년 동안 배운 영어단어를 총 동원해서 되지도 안는 말로 그 할머니에게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드디어 올렸습니다.  상당한 미인이시지요?>

 

to be revised and continued

2009년 11월 4일 수요일

Once upon a time 58 <나의 은인 영어선생님>

난 이 다음에 회고록을 쓰게 되면 꼭 남기겠다고 일찍이 생각했덨 것이 있다. 이 이야기는 현대자동차 Pony 수출 초창기 이야기가 아닌 아주 먼 옛날 이야기다.

 

나에게는 은인이신 호주 할머니, Mr. Beatrice Elizabeth Britingham 과 남편 Mr. G.J. Brtingham 가 계신다. 이들은 나의 영어 개인 교수였다. 영어 개인 교습을  받은 이야기다. 우연히 알게된 이들과 오래동안 인연을 이어 왔었는데 어떻게 하다 연락이 두절된지 수십년이 되었다. 현대자동차가 오스트랠리아에 자동차를 수출하면서 기회 있을때 마다 이들을 찾으려고 수소문했었지만 결국 찾지를 못했었다. 이미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을 추모하면서 이분들과의 기억을 되짚어 보려고 한다.  

 

나의 기억속에는 아직도 인자했던 백발의 오스트랠리아인 노 부부가 언제나 살아 계신다. 이들은 충청남도 남단,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북도 군산과 마주하고 있는 조그만 마을 장항에서 살고 있었다. 나의 제2의 고향인 장항에서 어린 시절을 살았던 나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는 전라북도 군산으로 다녀야 했다. 장항은 어촌인지 농촌인지 분명치 않은 조그만 곳으로 변변한 고등학교하나 없었다. 겨우 실업학교가 한두 곳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6년동안을 금강을 건너 배를 타고 물건너 군산으로 통학을 했었다.

 

얼마전 신문에 이렇게 지난 50년 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은 실어 나르던 애환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선은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운행은 중단한다는 기사를 읽은 일이 있는 그런 배였다. 이런 배를 타고 통학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도 곁들여 볼까 한다.

 

장항은 지금 그 이름마저 잊혀지고 있지만, 그당시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나와 있을 정도로 장항 제련소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그러니까 타지에서 알고 있는 장항은 그저 장항제련소 뿐이었다. 이곳은 큰 용광로에서 동광을 구리로 제련하는 공장으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몇째 안가는 큰 공장이었다. 포스코가 설립되기 전이었으니까. 장항제련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제련공장 딋편의 높이 백여미터의 작은 바위산 꼭데기위에 5-60 미터 정도의 높은 굴둑이었다. 수십리 밖에서도 보이는 이 굴둑에서 가끔 하얀 연기를 풀풀 뿜는 모습은 차라리 정겹기도 했던 시절이다. 당시는 환경을 눈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였을까?

 

그런 이 제련소에 호주인 기술고문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식료품을 구입하기 위해 매주 군산에 있는 미군 공군비행장에 가서 일 주일 분의 생활 필수품을 구입하러 장항 군산간을 운항하는 도선을 이용했었다. 이들은 회사에서 지급한  군용차를 일반용으로 개조한 지프를 타고 다녔었다.

 

to be continued

 

 

 

2009년 10월 3일 토요일

Once upon a time 57 <뱃떼기 생산>

뱃떼기 생산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은 나도 잘 안다. 생산관리를 맡아 보지 않았지만, 해외영업본부 살림을 관장하는 지원실을 맡으면서, 그 이전에 부품 수출을 맡으면서 재고관리는 개념 이상의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흔히 20,000개의 부품을 조립해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생산 라인을 개념으로 보면 첫번 단계로 차체(body)를 조립한는 공정이 있다. 차 밑바닥같은 플로어 패널(floor pane)위에 뼈대를 용접해 붙이고 지붕을 얹은 다음 앞 뒤문짝을 달고 엔진 덮개와 트렁크 덮게를 단다. 그 다음에는 페인트 샵으로 이동해서 방청 프라이머리 페인트부터 시작해서 몇차례의 공정을 지나 최종 도색까기 끝낸다. 다음 공정은 조립 공정이다. 엔진과 변속기등 샤씨를 장착한다. 앞 뒤유리를 달고 실내 각종 기기와 좌석 등과 같은 내장 마무리를 하고 바퀴를 장착한 다음 각종 시험을 거쳐 생산 최종 라인에서 오케이 싸인을 받으면 출고 대기장으로 이송되는 대략 위와 비슷한 순서를 거쳐 조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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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cpnntinued

2009년 9월 30일 수요일

전 에델만 김 호사장과 KAIST 정 재승 교수

지난 5월에 만났던 KAIST의 정재승 교수와 전 에델만 코리아 김 호사장과 모처럼 자리를 같이 했다. 김 호사장 재직시 나도 에델만과 인연을 맺었던 이후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 받는다. 오늘 약속 장소는 French Restaurant Maisonkiwa (메종기와)이다. 나는 이들 두분과 만나면 세대차이를 잊고 싶어진다. 이들 엘리트 석학들 과의 만남은 항상 나에게 새로운 젊음과 활력을 주기 때문이다. 

 

Maison Kiwa는 통의동 기와집. 전통 한옥을 약간 리노베이션 해서 사랑방 자리, 대청 마루자리, 건너방 등등 을 식당 홀로 개조했다. 우리 전통 기와집이 French Restaurant라는 게 쌩뚱 맞지만 나름 분위기가 있다.  이 식당은 테이블이 달랑 네개뿐이라고 한다. 예약으로 손님을 받는 이곳은 그야말로 매니아들이나 올 수 있는 곳. 식당도 뒷 골목에 있어 전화로 몇번 물어 찾아 갔다.

좋은식당을 소개하고 초대해 주신 두분께 감사드린다.

2009년 9월 29일 화요일

Once upon a time 56 <뱃떼기 생산>

대리점으로 부터 듣는 불만중 가장 자주 듣는 것은 품질 문제. 다음이 리드 타임이 길다는 것이었다.

리드 타임(lead Time)은 대리점의 입장에서 발주시점에서 부터 생산된 자동차가 대리점에 도착하기 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대리점이 발송한 생산주문을 접수하면 현대차 생산관리부는 수주한 차량의 스펙에 따라 자재를 수배하고 준비된 자재에 따라 생산 순서 (시퀀스- Sequence)를 정하여 공장생산 라인에서 생산이 시작된다. 여기서 문제는 수출차량의 생산관리가 나라별로 생산 순서를 잡던가 지역별로 모아서, 즉 중동지역이면 중동지역의 주문을 몰아서 생산하면 선적 항로별로 물량이 집하되기 때문에 선박 수배에도 좋고 대리점도 발주한 차랑이 오더별로 묶어 오기 때문에 재고 관리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공장의 생산 편이에 따라 시퀀스를 정하면서 이런 희망은 사라지고, 한 대리점에 각 차종별 칼라별 다양한 스펙으로 발주된 차량이 전량 생산 완료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된다. 발주된 차량이 생산이 안되어 남아있는 것을 백오더(back order)라고 한다. 이렇게 백오더 관리하는 것도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사실상 이런 문제를 없애기 위해서 선진국 대리점에 수출을 시작하면 서 사전 발주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이행은 잘 되지 않고 있었다.

 

뱃떼기 생산 다 읽어보기

to be continued

Once upon a time 55 <인플레이션>

아르헨티나에서 있었던 얘기 쬐끔만 더 하려고 한다.

 

매일 환율이 천정 부지로 올라가고, 이에 따라 가격이 매일 오르다시피 하는데 누가 자동차를 살 수 있겠는가?  이 대리점의 문제는 이 나라의 경제부터 안정을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외적인 원인으로 사업이 부진하면 우선 투자자는 사업 의지가 위축되기 마련이다.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대리점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빌딩을 찾아가 봤다. 아무리 멀어도 나는 직접 현장을 방문해서 눈으로 확인한다. 시내에 있는 건물에 조그만 사무실을 임대해 쓰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크게 실망했다.

 

보통 대리점하면 독립된 건물에 대형 쇼룸이 있고, 딜러에 보낼 자동차의 배송전 점검장인 PDI(Predelivery Inspection)야드도 부두 근처에 확보하고 있다. 이곳은 그런 시설을 확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현대라는 브랜드를 알젠틴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마케팅 계획에서 부터 판매망 구축의 미비한 점등을 지적했다. 대리점의 조직 강화등 많은 것을 지적하고 시한을 주고 획기적인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대리점은 우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는 교체되고 만다. 자동차 판매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투자하라면 누가 투자하겠는가? 그러나 여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의 현대 브랜드에 대한 믿음도 없고 해보겠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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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21일 월요일

Once upon a time 54<아르헨티나 선물>

얘기는 다시 1980년으로 돌아간다. Once upon a time story는 원래 원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시에 기록을 꼼꼼히 남긴 것도 아니다 (지금 가장 후회하고 있는 것). 그냥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것을 더듬어 쓰고 있기 때문에 시간의 공간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음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굳이 우리 말로 번역하면 '좋은 공기'이지만 시내 공기는 매연으로 탁하기만 했다. 아르헨티나가 옛 전성기의 번영은 어디 갔는지 이제 남미대륙에서 가장 경제사정이 형편없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위정자의 능력과 역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케이스다.

 

그 당시에는 해외 출장을 나올때는 현금이나 여행자수표를 가지고 나왔다. 일반인에게 크레딧카드가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쓰는 사람도 없었다. 나도 당시에 크레딧 카드라는 말을 들어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매번 출장때마다 현금 아니면 조금 안전하다는 여행자 수표를 몇 천달러씩 들고 나왔다. 소지한 수표를 언제나 안주머니에 집어 넣고 수시로 가슴을 쓸며 확인을 한다. 참 불안스런 일이지만 어쩌랴. 그래서 호텔을 잡으면 체킨하면서 우선 세이프티박스를 빌리는 게 일이었다. 그 속에 여권과 돈을 보관하고 하루 쓸 만큼만 환전하여 갖고 다녔다. 물론 지금은 방마다 세이프티박스가 있는 호텔이 일반화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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