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10일 목요일

Remember Mr. & Mrs. Britingham - Reminiscences

나는 이 다음에 혹시 회고록을 쓰게되면 이 이야기 만은 꼭 남기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있다. 나에게는 은인이신 호주에서 온 할머니. Mrs. Beatrice Alice Elizabeth Britingham 과 그의 남편 Mr. Britingham. 이들 부부한테서 배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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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억속에는 아직도 인자했던 백발의 오스트랠리아人 노부부(老夫婦)가 살아 계신다. 이들은 충청남도 남단, 금강(錦江)을 사이에 두고 전라북도 군산(群山)과 마주하고 있는 조그만 고장에서 살고있었다. 이 조그만 고장에서  내 일생을 바꾸어준 일이 일어났다. 나의 제2 고향인 장항(長項)에서  어린 시절을 살아온 나는 초등학교를 그곳에서 마치고 중학교는 전라북도 군산으로 다녀야 했다.  장항은 어촌인지 농촌인지가 분명치 않은 조그만 고을로 변변한 중학교나 고등학교가 없었다. 겨우 실업학교가 한두 곳이 있었을 뿐이였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6년동안을 금강(錦江)을 건너는 도강선(渡江船)을 타고 군산으로 다닌 것이다.

장항은 지금은 이름도 잊혀졌지만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와있던 장항제련소(長項製鍊所)로 유명하였다, 그러니까 타지에서 알고 있는 장항은 그저 장항 제련소 뿐이였다. 그런데 이곳에 豪州人인 기술고문이 제련소에 근무하였었고 이들은 식료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매주 군산에 있는 군산 미군비행장(美軍飛行場) PX에 가야만 했고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내가 타고 다니던 배를 이용하곤 했었다.
이들이 당시 타고 다니던 지프차가 신작로(新作路)를 먼지를 일으키면 달릴때 어린이들이 헬로 헬로 하면서 지프차 뒤따라 가던 그런 그림이 아직도 아련히 기억속에 살아 있다.

하루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길에 항상 타고 다니던 배의 갑판위에 이들이 타고 있는 지프차가 실려있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서 이들을 보기는 처음이였다. 항상 호기심이 많은 나는 기회다 싶어 이들 노부부앞으로 닥아가서 말을 걸었다. 처음 입밖으로 나온 말은 아마 "헬로"아니면  "굳 아프터 눈"이였을 것이다. 제련기술고문인 남편되는 분은 헐리우드 영화 배우 '리 마빈' 같이 흰 머리에  무뚝뚝한 인상이였고, 부인되는 분은 영국 여왕 '엘리자 벧 2세'와 비슷한 인상이지만 그 보다는 훨씬 미인이였다. 그들에게 닥아간 나는 내 이름을 말하고는 만나서 반가웠다는둥 말도 되지 않은 영어를 씨부리고 있는데 벌써 배는 장항 선착장에 도착해서 나중에 기회 있으면 또 만나기를 바라면서 배에서 시동을 걸고 떠나는 차에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들과 처음으로 몇마디 한 것이 어찌나 큰 기쁨이고 신기했던지 가슴이 설레이기 조차 하였다. 이들 노 부부는 지프차로 외출을 할때마다 예쁜 강아지를 부인이 가슴에 안고 다녔다.
긴털이 팔랑이는 큰귀를 바람에 나플거리면서 창밖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얼룩 강아지가 여간 품위있어 보이지 않았다. 당시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개의 개념은 그냥 집을 지키는 똥개, 보신탕 집에 끌려가는 개 정도였지만 이 개는 주인으로 부터 사랑을 받는 나보다 훨씬 더 호강하는 개였다.  그 잘생긴 개의 이름은 해피였다.

얼마후에 다시 군산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 노부부와 같은 배를 탔다. 그들은 일주일 분 식료품을 차에 가득 싣고 돌아오는 길이였고 나는 방과후 귀가하는 길... 자연스럽게 나와 나의 아주 친했던 친구는 용기를 내어 차에 닥아가서 인사를 하였다. 이럴때는 나는 표정이 이상해진다. 그때 나는 숙기가 좀 없는 편이었다. 이런 저런 중.고등학교 5년동안 배운 영어 단어를 총동원하여 되는 말 안되는 말을 대어가면서 영어회화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용기가 귀여웠던지 결국 요일(曜日)을 정해주면서 매주 자기집에 오라는 허락을 받았다. 이들은 장항제련소 관사(官舍)에서 살고 있었다. 그 당시 부인은 하는 일 없이 집에 있기가 무료(無聊)함을 달래기 위한 소일꺼리로 장항의 유지들을 집에 초청 무료(無料)로 영어를 가르쳐주고 있었던 것이였다. 거기에 내가 영광스럽게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들 어른들은 제련소소장, 장항읍장, 경찰서장, 세무서장, 병원원장, 그리고 교회 목사님.... 그야말로 읍내에서는 내노라 하는 분들이였고 이들 사이에 우리 두 소년들이 끼게 된 것이다. 이는 날아갈 것 같은 기쁨이기도 하면서 두려움도 앞섰다.

정해진 날에 친구와 나는 둘이서 그분의 집을 찾아 갔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은 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현관문 앞에서 초인종에 손을 뻗을때 가슴은 쾅쾅 뛰며 터질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어주는 분은 그 할머니. 얼굴에 웃음을 가득히 보이면서 우리를 맞아 주셨다.
"굳 이브닝 미스터 전, 굳 이브닝 미스터 김, 컴온인" 하시며 우리에게 존칭을 쓰는 것이였다. 선생님이 학생을 부를때 존칭을 사용한다는 것을 안 것은 몇십년이 지난 다음이였다.
현관안에 들어서자 은은하게 풍기는 처음 느끼는 맛있는 냄새와 집안은 따듯하고 푸근한 분위기였다. 그때가 1950년대 말이였으니까 그때를 살아보지 않은 젊은 세대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궁핍했었는지 짐작도 못 할 것이다. 맛있는 냄새(나중에 알고 보니 미제 케익 냄새였다), 따듯한 실내 공기가 내가 살고 있는 우리집하고는 많은 차이를 느낀 것이다.
오는데 춥지 않았느냐, 길은 미끄럽지 않았느냐고 물으며 우리를 따듯하게 맞아주신 이 할머니가 너무도 고마웠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분이 우리한테 말하는 것을 짐작만 할뿐 무슨 말인지는 도대체 못알아 들었다. 큰일 이였다. 괜히 왔구나! 후회 막급이였다.

시간이 좀 지나자 개인교습에 참석하는 어른 학생들이 모두 모였다. 공부가 시작된는 것이다. 교재는 유네스코(UNESCO)에서 발행한 Practice Your English였다. 나는 이책을 20여년 가까이 기념으로 보관하고 있었으나 몇차례 이사를 하는 동안 아깝게 없어지고 말았다.
책에 인쇄된 문장들은 그래도 좀 짐작으로라도 이해를 하겠는데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말인지 알아 듣기가 힘들었다. 이마에서 땀을 흘릴 정도로 당황을 하면서 한시간이 지나 첫 수업이 끝났다. 선생님한테 미안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얼굴을 들을 수가 없었다. 괜한 자격지심이였을까? 
이 할머니께서는 수업이 끝나면 잠시 잡담 시간을 가졌다. 배운 영어를 써보는 기회이기도 한 시간이였다. 이때는 꼭 케익 한 쪽을 꽃무늬가 있는 접시에 담아 참석한 학생들에게 모두 나누어 준다. 어른들은 커피를 나같은 학생은 어리다고 우유를 따듯하게 해서 주곤 했다. 수업시간은 땀을 흘리면서 끙끙댔지만 수업이 끝나고 담화시간은 너무 좋았다. 그 당시 이런 케익을 먹어본 사람은 아마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혀끝에서 녹아나는 케익 맛, 말로 형언할 수가 없는 맛이였다. 케익 먹는 맛에 공부하는 날이 기다려 지기도 했다.

이렇게 일주일에 두번 세번 정도 영어공부를 했지만 욕심같이 영어가 늘지도 않고, 매일 그대로 인 것 같아서 마음속으로 더 열심히 하자고 다짐을 무던히도 했다. 이번에는 이런 말을 해봐야지하고는 기회를 봐서 무슨 말을 열심히 한다.  하지만 그 노부부의 귀국때문에 영어 수업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되었을 때까지 내 영어는 그대로 인 것 같았다.  

이분들이 떠나기전 며칠전 장항읍내에서 제일 좋은 식당으로 이들 부부를 초청해서 우리 반 개인학급 동창들이 송별회를 열어드렸다. 그 자리에서 지난 기간동안 있었던 일등 여러가지 추억거리를 되새기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섭섭한 마음을 머금은채 식사도 했다. 이들은 귀국하면 우리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 듣겠다면서 한사람 한사람 하고싶은 말을 남겨달라고 녹음기 마이크를 돌렸다. 나는 내차례가 되기전에 어떤 말을 하겠다고 잔뜩 긴장을 하며 머릿속에 그렸지만 막상 녹음기 마이크를 잡는 순간 하고싶었던 말은 구름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어물어물 하고 말았다. 얼마나 무안했겠는가, 일년 반동안 그렇게 성의를 다해서 가르쳐 주었는데 이모양이 되었으니 울고 싶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 선생님은 내마음을 헤아리셨는지 내 등을 도닥거리며 앞으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시며 환하게 웃으셨다.

며칠후 그분들은 그분들의 고국인 오스트랠리아로 떠나셨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에 진학하였다.  시골 학생이 서울로 유학을 온 것이다. 몇달후에 이분으로 부터 편지 한장이 날아 왔다. 어떻게 지내느냐. 대학 생활은 잘 적응하고 있느냐 등등 할머니가 손자에게 묻는 안부 편지였다. 이렇게 이분과 편지 왕래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결혼해서 첫 아이를 나았을 때까지 12년간이나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어떻게된 일인지 편지왕래가 두절되고 잊혀진채 수년이 지났다.  그후 현대자동차 해외영업본부에서 일하게 되면서 호주 대리점에 오래된 편지에 쓰여있는 주소를 적어주면서 수소문해서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었으나 그분을 영영 찾지를 못했다. 연세도 있고 했으니 벌써 작고하신 모양이다.

지금 같이 사설 영어회화 학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외국인과 접촉할 수있는 기회도 흔치 않은 1950년대에 시골에서 이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였다. 이분 때문에 나는 다시 영어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영어를 할 수있는 동기를 주신 것이다. 그리고 내 직장생활의 기초가 될 수 있었기에 나에게 행운을 주신 분이다.  
내가 보낸 편지에 답장을 보낼때는 문법이나 표현이 잘 못된 부분을 지적하며 꼭 고쳐주시고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고 잊지 않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분을 못 만났다라면 해외영업과는 거리가 먼 일을 했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분 생각을 하면 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