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11일 토요일

Once upon a time 5 <첫 해외출장>

첫 근무 첫 해외출장

1977년 3월 2일 현대자동차 해외판매부(지금의 해외영업본부)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 지엠 코리아의 총체적인 모럴 해저드를 보며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다고 보고 그만둘 생각이었는데 현대자동차의 경력사원 모집광고를 보고 입사 지원서를 냈다. 시험은 영어와 자동차구조에 대한 몇 가지 필기시험을 보고 면접시험을 보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자동차 판매대수와 시장점유는 지엠 코리아가 우세했다. 이런 회사에서 일하겠다고 시험 보고 면접하는 게 마음이 편안하지는 않았다. 세 사람이 응시자들을 면접하였다. 이들이 묻는 말에 대충 대답하고 나왔다. 한 사람이 물었다. "영어 시험 잘 보았나요?" "뭐, 그냥 보았습니다." "어땠습니까? 시험문제가?" "모르는 단어가 있더군요." 이렇게 면접을 끝내고 나왔는데 며칠 후에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나중에 간접으로 들었는데 응시자 중에 내가 영어 시험 성적이 제일 좋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지엠 코리아는 모든 시스템이 미국 지엠의 것을 옮겨와 제법 짜임새 있는 회사다. 현대자동차에 와서 보니 공문 작성하는 것부터 엉성하게 느껴졌다. 경쟁사에서 왔기 때문에 나를 지켜보는 눈도 많은 것 같고 내 다리를 거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근무를 시작한 지 반년 정도 지났을 무렵 첫 해외출장을 떠나게 되었다. 지금 같지 않고 그때는 해외로 나가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70년대만 해도 외무부가 발행하는 여권은 단수 여권이었다. 단수 여권은 단 한 번의 여행만 허용하는 것으로 귀국하면 자동 폐기된다. 여행목적지도 일일이 기재되는 포지티브 시스템으로 목적지와 경유지가 기재된 나라만 갈 수가 있다. 

해외시장 개발 초창기여서 조사할 것도 많고 대리점의 불만도 많아 한번 출장을 떠날 때는 되도록 많은 나라를 순방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왕 장거리로 목적지에 갔으면 인근 나라도 보고 오라는 여비 절략 차원이었다. 공책만큼 두꺼운 비행기 표와 여행자 수표를 가지고 출장을 떠난다. 지금 같이 회사 크레딧 카드가 아니라 여행자 수표를 들고 다니니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 난다. 출장지는 중동의 몇 나라와 중서부 아프리카 몇 나라였다. 처음 비행기 타고 떠나는 오지 체험 정도 된다. 중동에서는 바레인, 카타르, 오만. 그리고 아프리카로 날아가 나이지리아, 세네갈, 시에라리온, 아이보리코스트, 가봉이었던 것 같다. 아닌가?

현대자동차가 수출한 자동차는 현대가 처음 개발한 국산차 포니는 품질 문제 투성이었다. 자동차의 인테리어는 뜨거운 햇볕에 갈라지고 탈색하고 엉망이다. 도착지 부두에서 통관도 되기전에 색이 바래고 갈라졌다. 도어핸들은 툭하면 부러져 길거리 돌아다니는 포니를 보면 도어핸들이 없어 줄로 묶고 다니고 있는 차도 보인다. 아무리 스페어로 부품으로 공급해도 부족하다. 사실 도어핸들은 소모품이 아니다. 마모되는 것도 아니어서 수요는 극히 미미한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판매한 차량 대수보다 더 많은 도어핸들이 필요했다면 과장된 얘기일까? 하여간 대리점을 도어핸들 때문에 고객의 원성을 듣고 있었다.

방문할 대리점을 결정할 때는 문제가 많고 불만이 많은 곳을 선택한다.  첫 해외출장의 첫 기착지는 바레인이었다. 우리나라 경상남도 만한 조그만 나라다. 면적은 41,500 km2. 그 당시 바레인 정부로부터 대형 건설공사를 딴 현대건설은 한국에서 파견된 건설현장 근로자들과 간부직원들이 숙식하는 곳이 있어 그곳에 가면 한국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출장비 아끼고 먹고 싶은 한국음식 먹고 일거양득이다. 개길 만큼 개기다 다음 목적지로 옮겨 가면 된다. 현대건설 공사 근로자 식당이 있어 덕을 많이 본다. 다음 출장지로 떠날 때는 구내식당 아줌마한테 아양을 떨며 부탁해 김치를 얻어 가기도 했다. 

얘기는 다음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