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은 A급 지역이요.
1980년 이름 봄이었다. 중역회의를 끝내고 돌아온 해외사업부장(지금의 해외영업본부장)이 나를 찾는다고 비서한테서 연락이 왔다. 당시 나는 기회조사과(지금의 해외 마케팅부과 비슷)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사업부 각 부서의 사업계획과 수출실적을 점검하고 보고한다. 동시에 신시장 개척에 관한 일에 많이 몰두하고 있었다. 기획조사과장으로 있으면서 북미시장의 전초기지 캐나다 시장 조사를 시작했던 것도 이때였다.
1980년에는 현대자동차 사옥은 번듯한 것 하나 없었다. 광화문의 현대건설 빌딩에 세 들어 살다 현대건설의 해외 수주로 사세가 확장하면서 비좁아지자 현대자동차는 종로구 계동에 있는 옛 휘문고등학교 건물로 밀려나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휘문고등학교 교사는 현대그룹이 사들인 것이다. 전통적인 목조 학교건물의 교실 사이의 벽을 허물어 내고 기다란 사무실로 쓰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주 오래전 일 같지만 불과 30년이 안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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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부장실에 들어가니 책상 앞에 세워 놓고는 뭔가 생색 내는 얼굴로 "전 차장이 앞으로 지역을 맡게 되었어. 지역은 A급 지역이지."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중남미를 내가 맡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다시 말했다. 지역담당이면 완성차 판매담당 지역 사령탑이라고 할까? 그야말로 여러 사람이 부러워하는 자리다. 그러면서 되게 생식을 낸다. 나는 감사한다는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밖으로 나와 잠시 자리에 앉아 이것저것을 생각했다. 이미 소문은 확 퍼져 모두 나에게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사업부장이 A 급지역이라고 말한 것은 당시 현대자동차의 수출 시장은 중동, 아프리카 와 라틴 아메리카였는데 중남미가 출장 다니기 그중 낫다는 뜻도 되고, 다른 은밀한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중남미 하면 스페인 식민지로 중남미 거의 모든 나라가 스페인 어를 사용한다는 것만 알았다. 나는 스페인 어는 우노, 도스, 트레스 도 모르는 쌩 판 모르는 문맹이었다. 걱정이 앞선다. 지금까지 중남미를 담당했던 부장은 나름 스페인 어를 잘하는 것 같았다. 국제 전화로 남미 대리점과 통화하면서 스페인 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을 듣고 기가 죽을 판이었다. 그 전임 부장은 여러 가지 문제로 임원들로 부터 눈 밖에 나고 결국 다른 부서로 밀려나게 되었다. 판매의 경력이나 스페인 어, 세일즈맨으로써의 자질은 나와 비교가 안 되는 인물이었지만 해외출장 동안의 개인 행실과 다른 문제로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해외판매부에서 퇴출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는 당시 사장님의 총애를 받았던 사람이다.
업무 인수인계도 채 끝나기 전에 사장님께서 당시 상공부 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중남미 경제협력단과 함께 님미 순방 출장을 떠나시는데 나보고 사장 수행 출장을 준비하라고 한다. 인수인계도 끝나지 않았고 업무파악도 아직 안된 나한테 게다가 남미 땅은 밟아 보지도 않았는데 사장님을 수행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지어준다. 사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십여 년 되는 동안에 그때처럼 처절한 좌절감을 느낀 적도 없을 것이다. 내가 모시고 가는 높은 분은 사장님이고 그를 수행하는 나는 차장 쫄다구이니 같이 가까이 옆자리에 탈 수도 없는 처지다. 서울서 출발한 비행기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내려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는 비행편이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페루 리마였다. 이등칸 맨 뒤에 가까운 자리를 잡고 있는 나는 내가 비행기에서 내리면 이미 사장님을 어디 계신지 안 보인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를 찾아 겨우 옆으로 가면 그는 나를 본체도 하지 않는다. 뭐가 싫은지 눈치를 보면 모르나. 그가 나를 봤을 때 한심했을 것이다. 그가 좋아하는 부장을 여러 중역들의 탄원에 해외사업부에서 퇴출했지만, 그와 나는 많은 경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장님이 나를 봤을 때 한심하게 느끼는 것은 당연했겠지만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남미담당 시켜달라고 했나?